☞…………… 추천시인/천상병57 편지 - 천상병 편지 - 천상병1 아버지 어머니, 어려서 간 내 다정한 조카 영준이도, 하늘나무 아래서 평안하시겠지요. 그새 시인 세 분이 그 동네로 갔습니다. 수소문해주십시오. 이름은 조지훈, 김수영, 최계락입니다. 만나서 못난 아들의 뜨거운 인사를 대신해주십시오. 살아서 더없는 덕과 뜻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사귀세요. 그 세 분만은 저를 욕하진 않을 겝니다. 내내 안녕하십시오.2 아침 햇빛보다 더 맑았고 전세계보다 더 복잡하고 어둠보다 더 괴로웠던 사나이들 그들은 이미 가고 없다. 2024. 10. 8. 아가야 - 천상병 아가야 - 천상병 해뜨기 전 새벽 중간쯤 희부연 어스름을 타고 낙심을 이리처럼 깨물며 사직공원길을 간다. 행인도 드문 이 거리 어느 집 문밖에서 서너 살 됨직한 잠옷 바람의 앳된 계집애가 울고 있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웬일일까? 개와 큰집 대문 밖에서 유리 같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이 애기는 왜 울고 있을까? 오줌이나 싼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자주 뒤돌아보면서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아가야, 왜 우니?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무슨 슬픔 당했다고,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가를 깨쳤다고 우니? 이 새벽 정처없는 산길로 헤매어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아가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줄 엄마손이 있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 2024. 10. 8. 주막에서 - 천상병 주막에서 - 천상병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훨씬 전에 내 안에서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 (장 쥬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저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한디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가는데 할머니 등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2024. 10. 7. 주일 - 천상병 주일 - 천상병내년 이 꽃을 이을 씨앗은바람 속에 덧없이 뛰어들어가지고핏발선 눈길로 행방을 찾는다.숲에서 숲으로, 산에서 산으로무전여행을 하다가모래사장에서 목말라 혼이 난다. 어린양 한 마리 돌아오다땅을 말없이 다정하게 맞으며안락의 집으로 안내한다.마리아.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 2024. 10. 7. 간의 반란 - 천상병 간의 반란 - 천상병 60 먹은 노인과 마주앉았다. 걱정할 거 없네 그러면 어쩌지요? 될 대로 될 걸세 보지도 못한 내 간이 괘씸하게도 구테타를 일으켰다. 그 쪼무레기가 뭘 할까마는 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원래 구테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수습을 늙은 의사에게 묻는데, 대책이라고는 시간 따름인가! 2024. 10. 7. 한 가지 소원 - 천상병 한 가지 소원 - 천상병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 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드러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 별다른 불만은 없지만, 똥걸레 같은 지성은 썩어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 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 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2024. 10. 6. 삼청공원에서(어머니 가시다) - 천상병 삼청공원에서(어머니 가시다) - 천상병 1서울에서 제일 외로운 공원으로 서울에서 제일 외로운 사나이가 왔다.외롭다는 게 뭐 나쁠 것도 없다고 되뇌이면서 이맘때쯤이 그곳 벚나무를 만발하게 하는까닭을 사나이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벚꽃 밑 벤치에서 만산을 보듯이 겨우의젓해지는 것이다. 쓸쓸함이여, 아니라면 외로움이여, 너에게도 가끔은 이와 같은빛 비치는 마음의 계절은 있다고, 그렇게 노래할 때도 있다고, 말 전해다오. 2 저 벚꽃잎은 속에는 십여 년 전 작고하신 아버지가 생전의 가장 인자했던 모습을 하고 포오즈를 취하고 있고, 여섯에 요절한 조카가 갓핀 어린 꽃잎 가에서 파릇파릇 웃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2024. 10. 6. 나의 가난은 - 천상병 나의 가난은 - 천상병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2024. 10. 6. 아버지 제사 - 천상병 아버지 제사 - 천상병 아버지 제삿날은 음력 구월 초사흗날 올해도 부산에 못 가니 또! 또! 아버님 영혼께서 화내시겠습니다. 가난이 천생인 것을 아버지 영혼이시여 살펴주소서 아버님 생전에 "가난하게 살아야 복이 있다" 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는 젊을 때 천석꾼이었는데 일본놈에게 속아 다 날리고 도일하여 돈을 버신 아버님 아버지! 아버지! 지금까지 생존하셨다면 팔십이 살짝 넘으셨을 아버지 오로지 천국에서 천복을 누리옵소서. 2024. 10. 5. 소릉조 (70년 추일에) - 천상병 소릉조 (70년 추일에) - 천상병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2024. 10. 5. 마음 마을 - 천상병 마음 마을 - 천상병 내 마음의 마을을 구천동이라 부른다. 내가 천시요 구천만큼 복잡다단한 동네다. 비록 동네지만 경상남도보다 더 넓고 서울특별시도 될 만하고 또 아주 조그만 동네밖에 안될 때도 있다. 뉴욕의 마천루 같은 고층건물이 있는가 하면 초가지붕도 있고 태고시대의 동굴도 있다. 이 마을 하늘에는 사시장철 새가 날아다니고 그렇지 않을 때는 흰구름이 왕창 덮인다. 이 마을 법률은 양심이 있을 뿐이고 재판소 따위로는 양심법재판소밖에는 없다. 여러 가지로 지적하려면 만자도 모자란다. 복잡하고 복잡한 이 마음 마을이여. 2024. 10. 5. 불혹의 추석 - 천상병 불혹의 추석 - 천상병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노자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다 지내고 음복을 하고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간다. 2024. 10. 4.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