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고후출판 19

인간의 공전 - 윤영환

인간의 공전 - 윤영환 태양 내부의 핵폭발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 태양을 벗어나 빛으로 지구까지 오는데 8분 19초가 걸린다. 즉, 우리는 약 8분 전의 태양을 보고 있는 셈이고 태양이 지금 폭발해도 8분 뒤에나 우린 알 수 있다. 그 태양을 지구가 돌고 지구를 달이 돈다. 누가 훼방을 놓지도 않고 수십억 년을 그렇게 돌고 있다. 밟을 땅이 없는 가스행성인 목성도 태양을 도는데, 지구로 날아 들어오는 유성들과 우주의 파편을 강한 중력으로 흡수하며 위성들과 돌고 있다. 그렇다고 지구가 목성을 숭배할 필요는 없다. 공전 궤도는 정해져 있고 마땅히 그렇게들 모든 행성은 잘 살아왔다. 만약에 목성이 지구에 관심을 두고 가까이 온다면 인류는 물론 지구도 사라진다.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말없이 살아간다. 지구의 인구..

기억 속 사진과 영상 - 윤영환

기억 속 사진과 영상 - 윤영환 인간의 묘한 기능 중 하나는 남겨둬야 하는 일을 반드시 머리에 새겨 두는 습관이다. 이 현상을 ‘우리는 기억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진과 영상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면 건강에 해가 된다. 그 일이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기억되고 있다면 그 일은 더욱더 당신에겐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사진과 달리 영상은 당신이 관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남아있으며 이외의 기억하지 못하는 영상들에 대해 당신은 원망 없이 살게 된다. 그런데도 기억하려 애쓰는 일은 거짓을 덧붙이려는 체계적인 작업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입학할 때나 그 이전의 어린 시절 기억들이 영상으로 남아있다면 당신은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지만, 사진으로 남아있는 사람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다. 나 역시 ..

자연스러운 것을 방해하는 것들 - 윤영환

자연스러운 것을 방해하는 것들 - 윤영환 느낌으론 하루 만에 가을이 가버린 것만 같다. 거리엔 아직 매달린 잎들이 많은데 겨울이 잎사귀들의 삶을 재촉한다. 아니, 아마 죽어버린 것들이 산 듯 매달려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방 안 공기가 몹시 차다. 곰팡이 냄새나는 옷가지를 뒤져 하나 걸쳤다. 그리 해도 손 발가락이 굳어 감각이 둔하다. 한 달에 한두 번 어머니를 뵈러 갈 때나 도서관 갈 때, 아니면 술이나 담배가 떨어지지 않는 한 나는 내 방을 벗어나지 않는다. 몇 년 동안 얼어 죽지 않은 것이 여간 묘한 게 아니다. 은행원, 포장마차, 보험설계사, 야구장 행상, 통닭 배달, 프로그래머……. 살며 경험한 직업이 서른 가지 남짓 된다. 생각해보면 조직 아닌 곳이 없다. 노점상을 해도 노점상연합회가 있고,..

씨 뿌리던 사람 - 윤영환

씨 뿌리던 사람 - 윤영환 엄마 주름은 줄 한 줄 그어진 내 전과기록 새겨진 주름은 지워지지 않고 문신 같아도 아름답기만 했는데 80년을 그려대니 온몸엔 여백이 없고 평생을 밭갈이만 한 듯 이마엔 골만 깊어진다 웃으면 펴지겠지 맨발로 뛰고 뒤도 안 보고 살았지만 밭고랑 내던 사람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네 순박하게 처진 눈으로 골 깊은 사이사이 굽은 허리 부여잡고 씨앗만 뿌리다 어데 갔는고 서지 않는 시간 타고 씨앗 따라 커버린 농부 수확하다 말고 양떼구름 사이 보고픈 얼굴 그리며 여울목 언저리 앉아 큰 숨 흙에 묻고는 차디찬 막걸리 한 잔 쥐어 잡는다 우린 서로 처음 본 사인데 왜 당신만 저를 위해 살아야 했나요 매화는 매년 봄을 잡아당겨 되돌아오지만 씨 뿌리던 사람 인사도 없이 한 번 가버리고 오지를 않네..

언제나 네 곁에 2 (부제 : 이태원에 뜬 별) - 윤영환

언제나 네 곁에 2 - 윤영환 (부제 : 이태원에 뜬 별)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이 하늘 문 열고 거룩히 이루어지던 날 허리 한번 펴지 못한 어머니와 삶을 반으로 쪼개어 살자던 당신을 뒤로 두고 꽃향기 가득하고 나비가 춤추는 곳으로 오르오니 육신을 흙에 묻어 매해 우지 마시고 어제 없던 작은 별 하나 보이거든 그 별을 사랑하소서 살포시 내 가슴에 들어온 뽀얀 손 잡고 일어서오니 한 곳만 바라보며 커져 있는 내 동공을 함부로 덮지 마시고 나 홀로 눈 감거든 고개 들어 이태원 밤하늘 그 별을 찾아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게 말해주오 이내 깜박이거든 축복 안에 있는 것이니 쓰다듬고 안아주소서 짧은 인연 거두어 당신의 그림자로 남아 태양 떠오르면 그대 뒤로 숨어 넘어지지 않도록 받쳐 드릴 터이니 달 떠오르면 어제..

사랑이란 - 윤영환

사랑이란 - 윤영환 사랑이 보입니까? 사랑이 뭔가요? 먹는 건가요? 사랑을 정의 내리기 위해 우리는 몇천 년을 방대하게 글로 그림으로 표현해왔습니다. 정의 내려지더이까? 뭐던가요? 우리 이야기해봐요. 뭐던가요? 크게 한숨들이 마시며 환하게 웃고 뱉어내며 나누세요. 그러면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마시고 뱉지 않으면 당신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돌고 돌아 비로 내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 구름을 만듭니다. 사랑을 몰아 마시고 뱉어 주지 않으시면 누군가는 숨이 막혀 죽습니다. 뱉어낼 때 포장 좀 신경 쓰시고요. 아주 귀한 선물이잖아요.

절대고독찬가 2 – 윤영환

절대고독찬가 2 – 윤영환 거울에 비친 나이 든 나를 본다 이곳저곳 깊게 팬 주름들 사이로 새겨진 희구한 사연들을 읽으며 거울 속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만 결코 바라볼 수 없는 동자의 흔들림 방대한 우주 속 홀로 섰는 작은 우주라는 나 그도 넓어 다 들여다보지 못하고 늙은 얼굴 나를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주변 은하수를 원망하지 않았다 장미보다 곱고 성인보다 성스런 너는 오로지 내 것 누구도 보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드넓고 순수한 바다 밀려오는 성난 파도를 가슴 가득 안아 아기처럼 재우는 모든 일을 알고 모든 일이 가능한 우주 속 떠도는 이방인 네가 낸 길은 참으로 푹신하다 서로 안다 암흑물질 속에 드리운 동아줄 잡아 오르는 나는 비겁한 방관자로 널 위로하지 못한다는 걸 내 철저한 침묵의 사자여 네 안에..

네 시간 - 윤영환

네 시간 - 윤영환 한가지 계명만 아는 동그란 건반에 피를 담은 호스가 감겨있다 사정없이 찔러대는 두 개의 굵은 바늘이 만드는 동맥과 정맥의 하모니 짜릿한 피의 흐름은 엄지발가락을 돌아 다시 심장으로 올라오고 가끔 하늘을 향해 뻗치는 솜털들과 육신의 경련을 아랑곳하지 않는 저 기계의 냉정함에 몸을 내맡긴다 살아야 하니까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하니까 힘겨운 네 시간에 이틀을 살고 이미 벌집이 된 팔을 들고 새벽바람 맞으며 모레도 기계 옆에 누워 네 시간을 온전히 바치겠지 살아야 하니까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하니까 이어폰에서 흐르는 맑은 피아도 소리에 눈을 감으면 또르르 눈물이 흐르고 지난날을 후회로 몰아넣는다 자신을 스스로 구속한 무딤에 무너진 나약한 육신 무심히 돌아가는 무정한 저 기계와 유기체로 보내는 네..

아내에게 - 윤영환

아내에게 - 윤영환 같은 하늘 아래 산다면 너를 그리워하는 기쁜 매일을 살아가겠지 언젠간 볼 수 있다는 매일의 희망이 커피잔 위로 피어오르겠지 그렇게 아침을 웃으며 끌어안게 될 거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다른 내일의 너를 기다리며 잠들 거야 기약은 없어도 언제나 널 울어 댈 거야 그렇게 하루하루를 기쁘게 울며 살겠지 너는 아니? 커피와 함께 내려지며 뒤섞여 사라져 가는 눈물을 두 손을 곱게 받쳐 들며 마시는 검은 눈물을 하늘에선 어떠니 나 어찌 사는지 혹, 넌 보이니? 2023.01 風文

가면 - 윤영환

가면 - 윤영환 코로나19 시대를 살아내며 변화된 모습 중 하나가 화법의 변화다. 보다 직설적이고 수사학적 표현이 줄었다는 일이다. 문장이 짧아지고 뭐든 짧게 말하려는 문화가 생겼다. 이 현상을 나는 ‘가면의 공식화’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기 전엔 외모뿐만 아니라, 말도 각종 장식과 꾸밈으로 상대를 대했다. 쉽게 말해 사회적 가면을 쓰고 참 나를 보이길 꺼렸다. 집이나 목욕탕에선 벗고 있으니 가면이 필요 없지만 나가려 옷을 챙겨 입는 순간 우리는 가면을 집어 든다. 그러나 코로나19 시대는 공식적으로 마스크를 권장하며 합법적으로 가면을 쓰게 해주니 돌려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말들이 직설화법으로 바뀌고 문자 메시지가 대세가 된 것이다. 이 많은 가면은 늙으며 한두 장씩 사라지고 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