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고후출판 19

언제나 네 곁에 - 윤영환

언제나 네 곁에 - 윤영환 함박눈 내리는 어느 날 이마에 땀이 흐르거든 네가 털어내기 전 스며든 나일 게다 작은 새 한 마리 네 어깨 위로 날아와 떠날 생각 않는 건 내가 앉아 쉬는 게다 성당 종소리에 놀라 갈대숲 사이로 철새 한 마리 튀어 오르면 널 보고 있던 나일 게다 헤매던 길 없던 이정표가 보이는 것도 바람이 지날 때 목이 간지러운 것도 열차표를 잃어버린 날 처음 집어넣는 호주머니 속에서 손에 잡히는 열차표도 나일 게다 무거웠던 짐이 가벼워지면 내가 같이 들고 있는 것이며 꿈속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네게 팔 베게 중일 게다 찾으려 애쓰지 마라 언제나 네 옆에 내가 있다.

절대고독찬가 - 윤영환

절대고독찬가 - 윤영환 지구 위 작은 방 한 켠이 먼 우주에서 지친 나를 재우려 한 오 분쯤 머물다가는 그런 곳이었으면 싶다 연결고리 하나 없는 나만의 시공간을 나는 만끽하고 앉았다 그 누구의 소리도 없는 나만의 이 공간이 과음한 다음 날 맛보는 속쓰림처럼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이 아림을 나는 성스럽게 즐긴다 아무런 소리도 없는 고요의 잔칫날 마치 처음 느낀 것처럼 기뻐 커다란 눈망울을 흔들던 아이의 동자 그 속에서 뛰어놀고 싶은 내게 삐걱거리는 의자가 발길을 재촉하고 나는 일어선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만족스런 삶은 절대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 저 흩날리는 비와 아직 녹아내리지 않은 눈들의 시작점에 나는 홀로 서 있다 바람이 눈물을 훑고 지난다

그림자 - 윤영환

그림자 - 윤영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평생 나를 따라 다니며 내가 저지른 짓들과 뱉어낸 말들을 저 놈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살며시 방 문턱에 서서 문을 확 닫아 끊어도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나를 따라오고 손을 뻗어 담배를 집어 들거나 술잔을 들어도 따라다니며 나를 감시한다 그래도 저 놈이 마음에 드는 것은 처음 만날 때와 지금의 색이 같고 인연들이 이별을 고해도 늘 나와 같이 있었으며 입이 무겁다는 것이다.

그리움 - 윤영환

그리움 - 윤영환 같은 하늘 아래 너와 내가 살아 있다면 이별이 아닐지도 몰라 서점에서 같은 책을 동시에 집어 든다면 같은 번호의 버스를 같은 정류장에서 기다린다면 같은 열차 앞 칸에 네가 앉아있다면 친구 결혼식 객석에서 널 본다면 모퉁이를 돌다 너와 부딪힌다면 아니면 훗날 너와 내가 같은 장소에 뿌려 진다면 새 한 마리 날아와 너와 나를 삼켜 한 몸속에서 너를 만난다면 그렇게 삶이 끝나 하늘 위에 너와 내가 산다면 이별이 아닐지도 몰라

이동식 레이더 - 윤영환

이동식 레이더 - 윤영환 땅거미 숨는 잿빛 보도 위의 또각거림 오른 뺨으로 여나무개의 골목입구가 지나갔다 다음 모퉁이 아니, 그 다음 모퉁이 버스가 서자마자 번호도 읽지 않고 올라탄다 정차 횟수나 목적지는 의미없고 앉아 흔들거리다 너의 느낌이 오면 주저없이 내려 걷는다 밤의 시작을 알리는 가로등의 신호를 엉거주춤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오른 뺨으로 여나무개의 골목입구가 지나갔다 곁눈질로 매 순간을 찍어대며 가까운 버스정류장을 향해 다시 쫓기듯 걷는다 우연히 마주치면 어떤 말을 할까 나는 널 찾아 다니며 산다 할까?

갔나봐 - 윤영환

갔나봐 - 윤영환 시계는 폐업했고 달력은 그날의 숫자만 보여준다 그마저 앗아 갈까 벽에 걸려 원을 그리고 있는 넥타이의 유혹을 가위로 끊으며 풀썩 주저앉는다 예나 지금이나 심장이 뿜어대는 대로 타들어 가는 붉은 연기를 넌 볼 수 없다 네가 원하는 하늘은 늘 푸른색이었고 아마도, 내가 늘 뱉어내는 담배연기랑 섞여 못 봤을 테니까 그래 그랬을 테야 흩날리던 체취 머문 자리 흔적들 쓸어 담아 가져간 후 이슬 되어 오를까 두렵다가도 네가 보는 푸른 하늘 구름 되겠지 우산 놓친 날 비되어 네게 스며들겠지 토닥이며 얼룩진 베게위로 잠든다 오늘더러 내일이어라 하며 그렇게 잠이 든다.

초침 - 윤영환

초침 - 윤영환 숫자 3 위에 검지를 대고 초침을 막았다 바늘서 주둥이 떼어 낸 붕어마냥 파닥거리는 초침 시간을 붙들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바늘 세 개를 모두 걷어 거꾸로 돌릴까하다 포기했다 지난 시간은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초침만 막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의미 없었는데 넘어가는 달력을 막아보려 했나 그렇지 앉아서 당하는 게 억울했을 테지 과거를 하나씩 버릴 때마다 미래가 두렵다.

엄마와 솜이불 - 윤영환

엄마와 솜이불 아침에 부스스 일어나 거실 커튼을 젖히니 동네 나무들과 지붕들이 새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소리 없이 내려 어둡던 시멘트 길도 화단도 눈부시게 덮어놨다. 눈발이 꽤 굵다. 발자국 하나 없다. 누군가 하늘에서 목화솜을 뿌리고 있는 듯하다. 가끔 이불가게를 볼 때면 솜틀집 생각이 난다. 이젠 솜틀집도 찾기 힘들다. 더군다나 이불들도 보온기능이나 디자인도 얼마나 예쁘게 나오는지 크고 무거운 목화솜 이불은 몇몇 장인들 외엔 만들지 않는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외진 골목에 있는 먼지 가득히 날리던 솜틀집에 이불을 맡기러 갔었다. 시간이 걸리니 엄마는 구멍가게로 데려가 과자 한 봉지를 사주시곤 했다. 다시 솜틀집으로 돌아오면 우중충하던 우리 집 솜이 크고 둥근 기계 사이로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되..

언제나 네 곁에 - 윤영환

언제나 네 곁에 - 윤영환 함박눈 내리는 어느 날 이마에 땀이 흐르거든 네가 털어내기 전 스며든 나일 게다 작은 새 한 마리 네 어깨 위로 날아와 떠날 생각 않는 건 내가 앉아 쉬는 게다 성당 종소리에 놀라 갈대숲 사이로 철새 한 마리 튀어 오르면 널 보고 있던 나일 게다 헤매던 길 없던 이정표가 보이는 것도 바람이 지날 때 목이 간지러운 것도 열차표를 잃어버린 날 처음 집어넣는 호주머니 속에서 손에 잡히는 열차표도 나일 게다 무거웠던 짐이 가벼워지면 내가 같이 들고 있는 것이며 꿈속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네게 팔 베게 중일 게다 찾으려 애쓰지 마라 언제나 네 옆에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