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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시 - 장석주

가을의 시 - 장석주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시고, 슬퍼하는 자들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시고, 부자들에게선 귀한 걸 빼앗아 재물이 하찮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학자들에게는 치매나 뇌경색을 내려서 평생을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시고, 운동선수들의 뼈는 분리해서 혹사당한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스님과 사제들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하소서. 전쟁을 하거나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하소서. 폐허만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하니 더 많은 분쟁과 유혈혁명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 참담한 지구에서 뻔뻔스럽게 시를 써온 자들은 상상력을 탕진하게 해서 더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시집을 내느라 더는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사람들이 시들고 마르..

신발論(론) - 마경덕

신발論(론) - 마경덕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씨앗의 몸에는 날개가 있다 - 조은

씨앗의 몸에는 날개가 있다 - 조은 지난 겨울 빈 화분에 강낭콩 한 알을 넣어 두었는데요 제 딴엔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는지 땅 속 어둠을 쪼개고 고 작은 손으로 탯줄 같은 길을 내지 않겠어요 달팽이 한 마리가 흙에 뒤섞여 꼼지락꼼지락 길을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도(修道) 하는 수행자처럼 젖은 몸을 햇빛에 헹구고 있었는데요 기도가 깊으면 하늘에 닿는 것인지 아, 글쎄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는게 아니겠어요 저 보세요. 파아란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감동(感動)에 관하여

감동(感動)에 관하여 남을 위해 뭘 도왔을까? 자기합리화 중이던 모습도 떠오르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것도 도움이라 생각하며 살기도 했다. 그렇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남을 돕는 일엔 특별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은 평범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도움은 조금의 감동이 포함되어야 참 맛이 아닌가 한다. 도움의 내용 속에 물리적으로 직접 돕는 것보단 간접적일 때 감동(感動)이 더하다고 느낀다. 한편의 글이나 시가, 읽는 이에게 감(感)을 주고 마음을 동(動)하게 해서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를 종종 본다. 좋은 글은 혜안을 넓혀주거나, 나보다 남을 생각하게 만드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해주는 감동스런 도구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으며 어떤 ..

오해와 소통

오해와 소통 내가 말하는 성격이 곧다는 말은 군대식 말투나 사무적 말투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며 만들고 키운 지조를 말한다. 때문에 여러 지조들 속에 살다보면 가끔 오해를 살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쌓을 정도는 아니고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혼자 생각으로 일으키는 오해라 쉽게 풀린다. 말에 살을 좀 붙여서 부드럽게 하려고 애는 쓰는데 쉽지 않다. 글이라면 억지로라도 좀 꾸며보겠는데 말은 참 힘들다. 어릴 적 별명이 많았는데 그중 코미디언도 있었다. 말을 잘하고 남을 잘 웃기곤 했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고 대중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공부하고 독서를 즐기며 나이 들수록 말은 줄어들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경우가 줄어들게 됐다. 잘난 지조 때문에 회사 같..

마음정비소는 무료

마음정비소는 무료 배에는 조타실이 있다. 배의 방향을 정해 바른 항로로 배를 몰고 가는 자동차 운전석과 같다. 그러나 기관실에 있는 엔진이 돌지 않으면 배는 움직이지 않는다. 암초나 항로를 보기 위해 지도도 있지만 레이더가 없다면 지금 항해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밤에도 위험하다. 선상에서의 일들은 갑판장의 지휘로 이루어진다. 화물을 내리고 싣기, 그물을 던지고 걷기, 사고를 대비한 정비, 입항하고 출항할 때 부두에 배가 잘 닫도록 관리도 한다. 오랜 항해를 대비해 조리실엔 조리장이 늘 음식을 준비하고 냉장고에 들어갈 식재료도 출항하기 전에 잘 챙겨야한다. 모든 사람이 각자가 근무하는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때 항해는 순조롭다. 유기적이며 한 사람이라도 의무를 소홀히 하면 항해는커녕 배..

글 시(時)와 시간

글 시(時)와 시간 1998년부터 빈 책에 글을 쓸 때 나는 끝에 시간을 적어 왔다. 1988년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 흔적이 있고 1992년 군 시절에도 있지만 본격적인 마감을 위한 글 시(時) 기입은 어림잡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작품을 썼기에 시간을 쓴 것이 아니라 나름 일기나 탈고의 기록이라는 의미로 남긴 것이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각 가정에 모두 보급되다 보니 웹페이지 상에 글을 올릴 때 역시 글이 만들어진 시간을 입력하는 명확한 시간을 표기한다. 누리터상에서 활발하게 문학 동호회 활동을 할 때나 기타 온라인상에서도 나는 내 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늘 표기해왔다. ‘2008.02.19 04:17 風磬 윤영환‘ ’2008.02.19 04:17 風磬‘ '2008.02.19 04:17 윤영환‘ ..

선택

선택 살다보면 반드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혼란스럽다면, 이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생각한다. 그 원인을 알면 해답이 나온다. 갈등으로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1년 뒤나 미래에 후회가 없겠는가를 생각한다. 그 선택은 자유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나의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변인을 둘러보고 나눌 만한 사람이 있다면 가서 이야기 해보자. 선택에 도움이 된다. 결정되면 빠른 선택이 필요하다. 머뭇거리면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다. 고로 미래에 후회하게 되느니 마음이 서면 뒤돌아보지 말자.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아직 선택한 것이 아니다. 선택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온다. 경험이 쌓이면 스스로의 철학이 생기며 바른 길을 아는 것처럼 착각한다. 세월이 지..

시간과 마음

시간과 마음 물통을 기울여도 물은 기울지 않습니다. 중력이 잡아 주니까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기울면 누가 잡아 주나요. 신이든 술이든 나 이외에 것에 기댈 필요가 있나요? 그렇게라도 평정심을 찾는 다면 좋겠지만 또다시 마음이 기울면 어쩌나요. 다시 그것들을 찾으면 되는 건가요? 시간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묘약입니다. 나 이외에 것들에 기대는 것 같아도 시간이 없다면 그것들도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라앉고 잊히며 물처럼 제자리로 돌아가려합니다. 사랑할 땐 시간이 멈추길 바라며 이별할 땐 시간을 거슬러 오르고 싶습니다. 어릴 땐 시간이 빨리 흐르길 바라며 늙으면 시간의 덧없음을 말합니다. 숨 쉬는 동안 우리는 늘 시간을 보낸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거짓말. 시간은 우리가 소유할 수 없기 때..

풍경(風磬)과 나

풍경(風磬)과 나 누리터에서의 이름이 바람의 종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람도 하인이 있냐고 묻지만 누리터에서 바람의 종이라 쓰는 것은 風磬 이라는 한자를 한글로 바꾸다 보니 바람의 종이라 쓰게 되었습니다. 바람과 풍경(風磬)은 떼어 놓을 수 없죠. 바람이 불어야 풍경이 우니 말입니다. 하지만 바람에겐 풍경은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쇠로 만든 종 따위는 소리 내는 것 외에는 별 의미도 없을뿐더러 풍경을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람은 불교적인 해석을 할 능력이 없어 풍경의 의미를 모르지요. 바람을 의인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풍부한 상상력은 뭐든 생각하는 존재로 만들기도 합니다. 바람이 없다면 풍경은 의미가 있을까요? 조각품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