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 32

매년 날 기다리는 작은 정원 - 윤영환

매년 날 기다리는 작은 정원 - 윤영환 여긴 6층, 베란다에 서서 늘 먼 곳만 바라보다 이맘때면 꼭 가봐야 하는 길이 1층 굽어진 어두운 터에 있다 짧지만 걷는 데 오래 걸리는 길 요즘만 걸을 수 있는 이 짧은 길을 좋아라 한다 낮은 둔덕을 걸으면 종아리엔 불끈 힘이 가고 이 꽃나무들 사이를 걷는 느낌은 온전한 봄을 몸으로 받는 버거움이다 밟고 있는 잔디는 아래로부터 온전히 전신에 봄을 가져다주고 멀리서 가끔 부는 바람 따라 내게 오는 꽃내음의 주인을 나는 알아챈다 바람 따라 온 꽃은 나도 피었으니 어서 오라 발길을 재촉게 한다 하지만 곧 건너 논에 김 씨네 모내기 시작하면 이곳에 피어난 온갖 꽃들이 날아가기 시작할 텐데 어쩌나 하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매년 찾아오며 아기처럼 웃는데 나는 왜 매년 늙어..

저작권 - 윤영환

저작권 - 윤영환 시는 노래다 마음을 꺼내는 건 시작(詩作)이다 기형도를 읽으면 인간의 본질로 가고 김수영을 읽으면 인간의 울분을 보고 이해인을 읽으면 인간이 갈 길을 안다 너의 마음 왜 꺼내질 않는가 표현은 삶의 의미 너를 밝혀야 태어난 이유가 된다 자유는 자연에 가까울 때 성립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건 자유가 없다 표현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강물 속에 또 다른 물이 흐르고 있음을 안다 그 물들이 왜 같다고 믿는가 발버둥은 의미 없는 것 거울을 보라 넌 늙었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울지 마라 모두가 여기 왔다 갔다 자연스럽게 시는 노래다 불러라 자연을 타고 흐르는 자유의 음률을 너의 인생을 편집하는 분은 따로 계신다 2024.01.25. 19:50

거부하며 - 윤영환

거부하며 - 윤영환 의무감으로 때론 심심해서 내게 어떤지 묻지 말았으면 해 네 시집에 난 실리기 싫어 나는 너보다 큰 존재이며 너의 일상사에 오르기 힘든 사람이란다 맹자가 그랬나 측은지심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라고 넌 지켰고 잘 따랐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으며 나는 나의 평화를 가지고 간다 몸부림 말고 순리를 따르라 난 네가 거추장스럽다 뒤에 흔적도 없이 가는 그 길을 아는 우리는 모두 외로운 벗 우지말고 따르거라 삶을 정리하다 네가 걸려 하는 말이니 앞만 보고 걸어 아무도 널 걸고넘어지지 않아 너와의 추억이 없구나 쌓아 가라 너만의 추억을 그것이 나의 후회다. 2024.01.24. 11:50

시한부 인생 - 윤영환

시한부 인생 - 윤영환 누구나 때가 되면 죽는다 이 판결을 의사가 미리 내리면 삶은 접힌다 학창 시절 아니면 청춘 시절 꾸었던 것은 이루었는가? 억울한가? 네가 저지른 짓들이고 그 업은 네게 온다 욕심 하나로도 넌 지옥이고 사랑을 모르는 네가 사랑을 하는 것이 죄다 평화를 알았으면 유지하려 힘쓰고 그대로 가라 네가 온 이 나들이 세계를 정 힘들면 장례식장을 찾거라 못 들어가게 하는 인간은 없다. 2024.01.24. 22:18

내 사랑이여 2 - 윤영환

내 사랑이여 2 - 윤영환 달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 나는 창을 닫고 커튼을 치지 그 빛을 따라 네가 올까 봐 신은 내집을 아니까 두려워 무서워 이렇게 사는 게 어둠 속에서 너를 제대로 그리겠나 하지만 난 잘 그려왔고 진실만을 담았다 두 번째 삶을 살아갈 때 나는 각오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기둥이 사라진 세상에 설 곳은 없었다 누구인가 사랑을 변론하며 다가왔지만 애초 나는 경고 했다 사랑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진실한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고 증명이 됐지만 뿌듯하진 않다 그의 자유를 내 발로 밟고 서기도 싫다 또 다른 사랑이 두려운 이유는 너 때문이 아니라 책임 때문이다. 네가 가르쳐준 말 무책임한 사랑은 해서는 안 된다는 말. 2024.01.24. 22:09

내 사랑이여 - 윤영환

내 사랑이여 - 윤영환 움직이지 않는 내 손 그 위로 간호사가 바늘을 얹었다 네 몫까지 행복해달라는 유언을 지켜주지 못하고 시한부 인생을 걷고 있다 하늘로 올라간 모든 가족이 보고 싶고 널 가장 보고 싶어 사랑의 의미를 널 통해 알았고 진정한 사랑을 다 보여준 네게 지금 난 할 말이 없어 미안타 앞치마를 하고 문 앞에서 퇴근을 기다리던 순진한 얼굴 그리고 달려들던 너 우리의 행복이 이렇게 짧을 줄 그 어떤 신이 말해 주겠나 내 삶 최상의 시간이었고 이 시간에도 널 그린다 볼의 느낌 잠결에 가슴으로 파고드는 얼굴 네 말이 맞다면 같은 곳에서 우린 만날 거야 기다려 얼마 남지 않았으니. 2024.01.24. 20:19

아내에게 2 - 윤영환

아내에게 2 - 윤영환 내 삶은 네가 끝이었다 너 하나로 만족했고 너의 존재는 나에게 사치였다 맑은 마음 녹슬지 않는 너의 언행 365일 밝고 해맑은 너 어떤 더러운 것도 침범 못하는 청정구역 난 충분히 너로 만족했다 그것만이 내 삶의 전부였고 그게 나의 다였다 살아만 달라고 했지만 넌 외면했고 난 홀로 운다 써도 마시고 달아도 마시며 그렇게 울고 산다 아직 너에게 올인 중이다.

외상 치르던 날 - 윤영환

외상 치르던 날 몇만 원이 손에 쥐어져 한 가지 생각에 멍한 눈으로 쫓기듯 밖을 나서 노 씨 아주머니 가게로 튄다 과자들이 바람에 빨려오란 듯이 문을 열고 들어서 입술의 양 끝을 내려 거만하게 외상값을 치르고 따지러 가듯 냉장고로 성큼성큼, 소주 두 병을 들고 그 자리에서 한 병을 잡고 뚜껑을 딴다 골든벨 울리듯 우쭐한 어깨로 삿대질을 해대며 담뱃갑들을 가리킨다. 노 씨 아주머니 귀가 입에 걸렸다 그 찰나는 나에게 최대행복의 순간이며 소주와 담배를 들고 가게 문을 나서는 순간은 늘 광복이다 즐김이며 또한 내 작품의 숨 쉬는 스냅사진이리 반으로 찌그러져 피다 만 굽은 꽁초들이 목봉 체조하듯 나란히 줄을 서면 뺑돌이 의자에 앉은 사장처럼 멋지게 더럽다 술 한 컵 털어 넣고 일그러진 꽁초를 새색시 만지듯 한 ..

문득 - 윤영환

문득 문득 생각나는 것들이 두렵다 가끔이 자주로 바뀌며 다가오는 문득이 한여름 공포영화 같다 살아온 날들이 문득의 가상공간이나 추억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도망자로 바뀌는 나를 볼 때 자신감은 국어사전속의 단어일 뿐 더 이상 내 어깨에 힘을 싣지 못한다 문득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전령이다 하지만 문득에 지배받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회복이 빠르다는 것이 절망과 다른 점이다 風磬 윤영환 : 2004.08.03 03:01 詩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