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기 - 윤영환 면도기 詩 / 윤영환 왼손에 면도기를 들고 오른손으로 비누칠한다 사각사각 깎여 나가는 것이 나뭇잎에 가려진 암자를 찾은 행자의 시작처럼 새롭다 지은 죄들의 종착지가 수염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다시 자라나는 수염이라 싫다 늘 비집고 기어 나오는 수염은 면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보다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올까? 의미 없이 느낌 없이 늘 비집고 기어 나오는 나의 죄는 면도기로도 깎을 수 없다 ♤…………………… 詩 2023.05.02
정거장 - 윤영환 정거장 기차역을 향해 도심을 걷고 있다 열차 시간에 맞추어 가야만 한다 이 길을 같이 걷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원망도 없었다 다들 의무인 양 운명인 양 같이 걸어왔다 보도블록 아래로 흐르는 묘한 기운 하나의 생명체로 역사를 쓰며 살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영혼들 어디서 왔는지 모른 체 심장 뛰다 가버린 내겐 의미 없는 박동들 그들의 숨소리에 보도블록 틈새로 흙이 튄다 도로를 모조리 뒤집어 일으켜 세우고 싶다 무엇을 위해 살다 갔는지 내가 왜 알아야 하는지 묻고 싶다 지친 사람들은 의자 보란 듯 대기실 바닥에 눕는다 굳은살과 주름들은 순박한 노동의 나날을 노래하고 십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옷가지들을 걸치고 있다 낡은 사진 속 학사모 쓴 자식들에게 입 맞추며 우는 할아버지 누군가를 기다리듯 대.. ♤…………………… 詩 2023.05.02
동산(童山) - 윤영환 동산(童山) 보고픔에 서둘러 계단을 올라 꿈나무방문을 열었다 몇 초간 눈을 마주치고는 아장아장 걸어와선 양팔을 벌려 내 무릎을 끌어안는다 가까이 다가가야만 흰자위를 볼 수 있는 크고 까만 눈을 가진 아이 말똥말똥 신기한 듯 갸우뚱갸우뚱 손을 뻗어 나의 볼을 만지작만지작 고사리 같은 검지가 내 입으로 들어간다 까르르 웃으며 정(情)을 바라는 외로운 천사는 아마도 내가 포근히 안아주기만을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 온 것만 같다 나를 모를 텐데, 이 아이는 나를 모를 텐데 아이들의 동산(童山)이 되어 올라타고 밟고 뛰도록 놀아주기를 몇 시간 동행의 일어서자는 말에 심장이 멎는 듯하다 장독대 항아리 뚜껑 내리듯 아이들을 내려놓음에 떠나지 말라는 듯 무릎 주위로 아이들이 모여들고 해맑은 얼굴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 ♤…………………… 詩 2023.05.02
주정 (酒酊) - 윤영환 주정 (酒酊) 봄을 노래하면 여름을 기다리나보다 합니다 봄을 봤다면 봄을 노래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당신의 봄노래를 들어야만 봄인 줄 아는 사람 없거든요 사랑을 노래하면 외로워하나 보다 합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은 이미 식었거나 떠났을 테니까요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사랑을 하는 사람은 차분히 앉아 사랑을 써 내릴 시간이 없답니다 효도를 말하면 그 사람 측은해 보여요 살아계실 때 섬기지 못했거나 지금 효도한다고 쇼하는 것입니다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울 아버지 가시고 나서야 효도가 입버릇 돼버렸으니까요 이슬비에 옷 젖어 화내는 사람 없어요 각오하고 걸어왔거든요 소나기 맞고 옷 젖으면 화내죠 비 맞을 각오 안 했거든요 당연한 것들과 남들 다 아는 것을 노래.. ♤…………………… 詩 2023.05.02
정(情)훔치다 잡힌 날 - 윤영환 정(情)훔치다 잡힌 날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나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겠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 느낌이 어떤가? 아니, 당신이 사는 방식은 어떤가? 내가 원하는 것은 없으니 줄 테면 놓고 가라 당신이 원하지는 않지만 놓고 가겠네 느낌이 어떤가? 아니, 당신이 사는 방식은 어떤가? 필요할 때 표현 방식이 구걸인가 투정인가? 협박이라면 이따위 말은 필요 없겠지 차라리 구걸하지 왜 훔쳐 훔치기를 훔쳐서 어디다 줬어? 주는 방식이 뿌리는 형식인가 아니면, 시간 지나 준 것을 잊는 형식인가? 혹시 돈으로 사고팔았나? 자넨 이미 정 중독이야 정이 모자라니 사고나 치던가 툭 하면 나랑 조서나 쓰고 앉았지 재판 전에 충고 하나 하지 정(情)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마음심 옆에 무엇이 붙어.. ♤…………………… 詩 2023.05.02
신기하지? - 윤영환 신기하지? 틀어봐 조금만 틀어서 봐 잘 보이지? 나도 가끔 틀어서 봐 그러면 세상이 바로 보여 신기하지? 바로 보면 세상은 왜 기울어져 있을까? 나도 그저 가끔 그렇게 세상을 틀어서 봐 왜 그런지 나도 몰라 비딱하게 보면 이상하게도 세상이 바로 보여 윤영환風磬 : 2004.11.08 04:08 詩時 ♤…………………… 詩 2023.05.02
세풍(世風) - 윤영환 세풍(世風) 詩 / 윤영환 품어다오 나를 품고선 한도 끝도 없이 날아다오 내세에 이루어진들 무엇하고 금세에 떠난들 무엇할 것인가 나서 자란 저 고목과 지금껏 같이 울어도 소리 한 자락 없어 털고 일어서니 나를 품고 떠나다오 해 오름 들녘의 늙은 버들은 서낭당 누워 사는 한 많은 아낙의 저고리 손짓 네가 몰고 온 놈들이 노닐다 갔으니 육신의 숨소리 없는 나를 보담아 젖은 영혼 보살피고 쓰다듬어 예 두지 말고 어서 나를 품어 가다오 ♤…………………… 詩 2023.05.02
사랑하고 있다면 - 윤영환 사랑하고 있다면 - 윤영환 사랑할 땐 약속 같은 거 하지 마 이별 후에 더 슬퍼지거든 난들 이별을 생각하며 사랑했겠니 꿈에도 생각 안 했어 사랑 찾아오듯 이별도 그렇게 스며들더라 아픔은 사랑의 실패가 주는 게 아니야 아픔은 이별이 주거든 이별은 사랑과는 무관한 것 같아 떠올려보면 사랑하는 동안 아픔은 없었어 기억해둬 사랑이 이별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걸 이별은 소설 쓰듯 생각이 많아지거나 미래에 대해 혼자서 불안해하거나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노크하더라고 사람들은 이별인 줄 모르고 들리는 노크 소리에 무심코 문을 열지 한여름 땅이 잠기는 무서운 물의 흐름보다 늘 네가 숨겨둔 꼬질꼬질한 자로 이리 재고 저리 재는 마음의 흐름이 더 무서운 거야 지금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만을 위한 하나의 흐름으로 사랑만 하.. ♤…………………… 詩 2023.04.30
촛불 - 윤영환 촛불 꺼질 때가 되었음인데 살랑살랑 바퀴 돌아 우는 것이 기생년 옷고름 같아 홀딱 빠져든다 몸이 녹아 바닥에 퍼져 떠안을 기세임에도 굴하지 않고 몸부림이 승무(僧舞)로 뒤바뀌어 숙연하다 심지가 붉어라붉어라 외치면 봉창 여지 마라 울며 춤을 춘다 詩時 : 2004.11.27 02:08 風磬 윤영환 ♤…………………… 詩 2023.04.30
복숭아 - 윤영환 복숭아 - 윤영환 많은 땀 뽑아내던 태양이 산으로 숨으며 땅거미 질 무렵 복숭아 세 개가 볼을 비벼대는 검은 비닐봉지를 흔들며 걷는다 땀이 수놓은 하얀 소금꽃 배어 나온 검은 바지 차림 한 남자 그의 집으로 향하던 경쾌한 구두 연주가 갑자기 멈춘 것은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목을 앞으로 뺀 채 뒤로 한참 젖혀진 어깨 흔들기 힘들어 뒷짐 진 두 팔 가슴과 배를 앞으로 내밀고 걷는 묘한 걸음걸이의 그 사람을 바라보며 남자는 묘한 미소를 짓는다 다른 골목과 만나 엉거주춤 멈춰서 두리번거림이 어린아이처럼 귀엽기도 하지만 흰색 파마에 안쓰럽기도 하다 여름내 입던 낡은 보랏빛 반바지의 허리띠는 붉은색 빨랫줄 소매를 빙 돌아 닳고 닳아 실밥 날리는 흰색 셔츠 몇 미터 앞까지 다가와서야 깜짝 놀라며 남.. ♤…………………… 詩 202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