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 32

면도기 - 윤영환

면도기 詩 / 윤영환 왼손에 면도기를 들고 오른손으로 비누칠한다 사각사각 깎여 나가는 것이 나뭇잎에 가려진 암자를 찾은 행자의 시작처럼 새롭다 지은 죄들의 종착지가 수염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다시 자라나는 수염이라 싫다 늘 비집고 기어 나오는 수염은 면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보다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올까? 의미 없이 느낌 없이 늘 비집고 기어 나오는 나의 죄는 면도기로도 깎을 수 없다

정거장 - 윤영환

정거장 기차역을 향해 도심을 걷고 있다 열차 시간에 맞추어 가야만 한다 이 길을 같이 걷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원망도 없었다 다들 의무인 양 운명인 양 같이 걸어왔다 보도블록 아래로 흐르는 묘한 기운 하나의 생명체로 역사를 쓰며 살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영혼들 어디서 왔는지 모른 체 심장 뛰다 가버린 내겐 의미 없는 박동들 그들의 숨소리에 보도블록 틈새로 흙이 튄다 도로를 모조리 뒤집어 일으켜 세우고 싶다 무엇을 위해 살다 갔는지 내가 왜 알아야 하는지 묻고 싶다 지친 사람들은 의자 보란 듯 대기실 바닥에 눕는다 굳은살과 주름들은 순박한 노동의 나날을 노래하고 십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옷가지들을 걸치고 있다 낡은 사진 속 학사모 쓴 자식들에게 입 맞추며 우는 할아버지 누군가를 기다리듯 대..

동산(童山) - 윤영환

동산(童山) 보고픔에 서둘러 계단을 올라 꿈나무방문을 열었다 몇 초간 눈을 마주치고는 아장아장 걸어와선 양팔을 벌려 내 무릎을 끌어안는다 가까이 다가가야만 흰자위를 볼 수 있는 크고 까만 눈을 가진 아이 말똥말똥 신기한 듯 갸우뚱갸우뚱 손을 뻗어 나의 볼을 만지작만지작 고사리 같은 검지가 내 입으로 들어간다 까르르 웃으며 정(情)을 바라는 외로운 천사는 아마도 내가 포근히 안아주기만을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 온 것만 같다 나를 모를 텐데, 이 아이는 나를 모를 텐데 아이들의 동산(童山)이 되어 올라타고 밟고 뛰도록 놀아주기를 몇 시간 동행의 일어서자는 말에 심장이 멎는 듯하다 장독대 항아리 뚜껑 내리듯 아이들을 내려놓음에 떠나지 말라는 듯 무릎 주위로 아이들이 모여들고 해맑은 얼굴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

주정 (酒酊) - 윤영환

주정 (酒酊) 봄을 노래하면 여름을 기다리나보다 합니다 봄을 봤다면 봄을 노래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당신의 봄노래를 들어야만 봄인 줄 아는 사람 없거든요 사랑을 노래하면 외로워하나 보다 합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은 이미 식었거나 떠났을 테니까요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사랑을 하는 사람은 차분히 앉아 사랑을 써 내릴 시간이 없답니다 효도를 말하면 그 사람 측은해 보여요 살아계실 때 섬기지 못했거나 지금 효도한다고 쇼하는 것입니다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울 아버지 가시고 나서야 효도가 입버릇 돼버렸으니까요 이슬비에 옷 젖어 화내는 사람 없어요 각오하고 걸어왔거든요 소나기 맞고 옷 젖으면 화내죠 비 맞을 각오 안 했거든요 당연한 것들과 남들 다 아는 것을 노래..

정(情)훔치다 잡힌 날 - 윤영환

정(情)훔치다 잡힌 날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나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겠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 느낌이 어떤가? 아니, 당신이 사는 방식은 어떤가? 내가 원하는 것은 없으니 줄 테면 놓고 가라 당신이 원하지는 않지만 놓고 가겠네 느낌이 어떤가? 아니, 당신이 사는 방식은 어떤가? 필요할 때 표현 방식이 구걸인가 투정인가? 협박이라면 이따위 말은 필요 없겠지 차라리 구걸하지 왜 훔쳐 훔치기를 훔쳐서 어디다 줬어? 주는 방식이 뿌리는 형식인가 아니면, 시간 지나 준 것을 잊는 형식인가? 혹시 돈으로 사고팔았나? 자넨 이미 정 중독이야 정이 모자라니 사고나 치던가 툭 하면 나랑 조서나 쓰고 앉았지 재판 전에 충고 하나 하지 정(情)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마음심 옆에 무엇이 붙어..

세풍(世風) - 윤영환

세풍(世風) 詩 / 윤영환 품어다오 나를 품고선 한도 끝도 없이 날아다오 내세에 이루어진들 무엇하고 금세에 떠난들 무엇할 것인가 나서 자란 저 고목과 지금껏 같이 울어도 소리 한 자락 없어 털고 일어서니 나를 품고 떠나다오 해 오름 들녘의 늙은 버들은 서낭당 누워 사는 한 많은 아낙의 저고리 손짓 네가 몰고 온 놈들이 노닐다 갔으니 육신의 숨소리 없는 나를 보담아 젖은 영혼 보살피고 쓰다듬어 예 두지 말고 어서 나를 품어 가다오

사랑하고 있다면 - 윤영환

사랑하고 있다면 - 윤영환 사랑할 땐 약속 같은 거 하지 마 이별 후에 더 슬퍼지거든 난들 이별을 생각하며 사랑했겠니 꿈에도 생각 안 했어 사랑 찾아오듯 이별도 그렇게 스며들더라 아픔은 사랑의 실패가 주는 게 아니야 아픔은 이별이 주거든 이별은 사랑과는 무관한 것 같아 떠올려보면 사랑하는 동안 아픔은 없었어 기억해둬 사랑이 이별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걸 이별은 소설 쓰듯 생각이 많아지거나 미래에 대해 혼자서 불안해하거나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노크하더라고 사람들은 이별인 줄 모르고 들리는 노크 소리에 무심코 문을 열지 한여름 땅이 잠기는 무서운 물의 흐름보다 늘 네가 숨겨둔 꼬질꼬질한 자로 이리 재고 저리 재는 마음의 흐름이 더 무서운 거야 지금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만을 위한 하나의 흐름으로 사랑만 하..

복숭아 - 윤영환

복숭아 - 윤영환 많은 땀 뽑아내던 태양이 산으로 숨으며 땅거미 질 무렵 복숭아 세 개가 볼을 비벼대는 검은 비닐봉지를 흔들며 걷는다 땀이 수놓은 하얀 소금꽃 배어 나온 검은 바지 차림 한 남자 그의 집으로 향하던 경쾌한 구두 연주가 갑자기 멈춘 것은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목을 앞으로 뺀 채 뒤로 한참 젖혀진 어깨 흔들기 힘들어 뒷짐 진 두 팔 가슴과 배를 앞으로 내밀고 걷는 묘한 걸음걸이의 그 사람을 바라보며 남자는 묘한 미소를 짓는다 다른 골목과 만나 엉거주춤 멈춰서 두리번거림이 어린아이처럼 귀엽기도 하지만 흰색 파마에 안쓰럽기도 하다 여름내 입던 낡은 보랏빛 반바지의 허리띠는 붉은색 빨랫줄 소매를 빙 돌아 닳고 닳아 실밥 날리는 흰색 셔츠 몇 미터 앞까지 다가와서야 깜짝 놀라며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