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끼는詩 9

젖 - 전순영

젖 - 전순영 질경이가 목이 말라 고개 숙인 7월 한낮, 나도 목이 말라 고개 숙인다 내 목에다 물을 부어주니 축 늘어진 팔다리가 금방 펄펄 살아난다 벼 보리 콩 팥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먹는 것은 어머니가 낳지 않은 것이 없다 하늘 아래 목숨이란 목숨은 그에게 입을 대고 산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배를 가르고 몸을 토막을 내고 두들겨 패고 불로 지지고 극약을 쏟아 붓고, 날마다 수천억 개의 비닐봉지를 한 번 쓰고 그에게 던지면 그는 숨이 막힌다 얼굴을 가린 음식물은 고름이 되어 그의 입으로 들어간다. 그는 묵묵히 삼키고 폭 삭혀서 새하얀 물을 저장해 두었다 자식들의 목구멍으로 쏟아부어준다 그는 지렁이 어머니 사자의 어머니 학의 어머니, 아름드리나무에서 개미 한 마리까지 우리는 매일 그의 젖을 빠는 아..

전화 - 마종기

전화 - 마종기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꽃 - 김춘수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가을의 시 - 장석주

가을의 시 - 장석주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시고, 슬퍼하는 자들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시고, 부자들에게선 귀한 걸 빼앗아 재물이 하찮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학자들에게는 치매나 뇌경색을 내려서 평생을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시고, 운동선수들의 뼈는 분리해서 혹사당한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스님과 사제들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하소서. 전쟁을 하거나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하소서. 폐허만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하니 더 많은 분쟁과 유혈혁명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 참담한 지구에서 뻔뻔스럽게 시를 써온 자들은 상상력을 탕진하게 해서 더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시집을 내느라 더는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사람들이 시들고 마르..

신발論(론) - 마경덕

신발論(론) - 마경덕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씨앗의 몸에는 날개가 있다 - 조은

씨앗의 몸에는 날개가 있다 - 조은 지난 겨울 빈 화분에 강낭콩 한 알을 넣어 두었는데요 제 딴엔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는지 땅 속 어둠을 쪼개고 고 작은 손으로 탯줄 같은 길을 내지 않겠어요 달팽이 한 마리가 흙에 뒤섞여 꼼지락꼼지락 길을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도(修道) 하는 수행자처럼 젖은 몸을 햇빛에 헹구고 있었는데요 기도가 깊으면 하늘에 닿는 것인지 아, 글쎄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는게 아니겠어요 저 보세요. 파아란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가을노래 - 이해인

가을노래 - 이해인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며 소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의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나는 죽으면 - 주성임

나는 죽으면 - 주성임 나는 죽으면 꽃이 되야지 누구라도 내 향에 취하면 찍고 싶어할 향을 갖고 나야지 그리곤 네 앞에 피어나야지 너의 두 팔 안에 기쁨으로 감기어 며칠만 너랑 살다가야지 나는 죽으면 별이 되야지 온 하늘의 뜨는 별을 이기고 유독 환한 빛을 내는 별로 하룻밤만 살아야지 넌 잠도 들지 못하며 나만 바라보다 먼 동에 슬며시 고개를 묻고 나는 네 안에 꿈으로 있다 스러져 가야지 나는 죽으면 너로 다시 나야지 꼭 한순간만 살아야지 하여, 너만 바라는 쓸쓸한 사랑을 만나면 꼬옥 안아줘야지 그처럼 날 닮은 가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줘야지 잠시만 너를 대신해 사랑을 고백하고 이렇게 아프지 않을 추억되야지 주성임 1968. 6. 26 파주 연다산리 출생 「오늘의 문학」,「시인과 육필시」등단 천리안 문단..

그때는 몰랐습니다 - 김영애

그때는 몰랐습니다 - 김영애 뜬금 없이 찾아온 그대 맘 좋은 척 한자리 내어준 것이 밤낮 가리지 않고 부등켜 울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시간의 징검다리 맨 끝, 보여주기란 늘 주저함이 있고 어둠에 길들여진 그대 가끔씩 포식되는 햇살 한줌에 목젖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았던, 이대로 일정한 간격을 두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여물지 못한 사랑이 불뚝불뚝 길을 낸 생채기 부풀어 올라 몸살을 앓아도 한차례 홍역처럼 지나가려니 그래서 늘, 뒷전이었던 그대 생각이 앞질러 새벽을 깨울 즈음 외톨이였던 신음이 참을 수 없는 몸짓으로 들고 일어 난 것을 사랑이라 불리웠으면 애초에 마음주지 말아야 했습니다 울다 울다 도드라진 아픔만큼 그대도 따라 울지만 별리의 아픔 손 끝 까지 못질할지언정 비켜간 마음자리 두고두고 상흔으로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