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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그림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평생 나를 따라 다니며 내가 저지른 짓들과 뱉어낸 말들을 저 놈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살며시 방 문턱에 서서 문을 확 닫아 끊어도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나를 따라오고 손을 뻗어 담배를 집어 들거나 술잔을 들어도 따라다니며 나를 감시한다 그래도 저 놈이 마음에 드는 것은 처음 만날 때와 지금의 색이 같고 인연들이 이별을 고해도 늘 나와 같이 있었으며 입이 무겁다는 것이다. 詩時 : 2005.01.17 11:20 風磬 윤영환

그리움

그리움 같은 하늘 아래 너와 내가 살아 있다면 이별이 아닐지도 몰라 서점에서 같은 책을 동시에 집어 든다면 같은 번호의 버스를 같은 정류장에서 기다린다면 같은 열차 앞 칸에 네가 앉아있다면 친구 결혼식 객석에서 널 본다면 모퉁이를 돌다 너와 부딪힌다면 아니면 훗날 너와 내가 같은 장소에 뿌려 진다면 새 한 마리 날아와 너와 나를 삼켜 한 몸속에서 너를 만난다면 그렇게 삶이 끝나 하늘 위에 너와 내가 산다면 이별이 아닐지도 몰라 詩時 : 2008.11.02 06:19 윤영환

이동식 레이더

이동식 레이더 땅거미 숨는 잿빛 보도 위의 또각거림 오른 뺨으로 여나무개의 골목입구가 지나갔다 다음 모퉁이 아니, 그 다음 모퉁이 버스가 서자마자 번호도 읽지 않고 올라탄다 정차 횟수나 목적지는 의미없고 앉아 흔들거리다 너의 느낌이 오면 주저없이 내려 걷는다 밤의 시작을 알리는 가로등의 신호를 엉거주춤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오른 뺨으로 여나무개의 골목입구가 지나갔다 곁눈질로 매 순간을 찍어대며 가까운 버스정류장을 향해 다시 쫓기듯 걷는다 우연히 마주치면 어떤 말을 할까 나는 널 찾아 다니며 산다 할까? 詩時 : 2005.11.08 18:33 風磬 윤영환

갔나봐

갔나봐 시계는 폐업했고 달력은 그날의 숫자만 보여준다 그마저 앗아 갈까 벽에 걸려 원을 그리고 있는 넥타이의 유혹을 가위로 끊으며 풀썩 주저앉는다 예나 지금이나 심장이 뿜어대는 대로 타들어 가는 붉은 연기를 넌 볼 수 없다 네가 원하는 하늘은 늘 푸른색이었고 아마도, 내가 늘 뱉어내는 담배연기랑 섞여 못 봤을 테니까 그래 그랬을 테야 흩날리던 체취 머문 자리 흔적들 쓸어 담아 가져간 후 이슬 되어 오를까 두렵다가도 네가 보는 푸른 하늘 구름 되겠지 우산 놓친 날 비되어 네게 스며들겠지 토닥이며 얼룩진 베게위로 잠든다 오늘더러 내일이어라 하며 그렇게 잠이 든다. 詩時 : 2006.01.25 05:04 風磬 윤영환

왜 쓰는 가

왜 쓰는 가 찾아 온 이가 무엇으로 그리 고단한 분홍빛인가 선인의 말들이 자네에게는 개 짖는 소리 아니었던가 가진 것이 있어야 풀칠이라도 할 것 아닌가? 품은 것이 없어 펼칠 것도 없으니 이젠 어데다 하소연을 할 텐가 입이나 열어 면치레나 둘러보게 자네가 온갖 넋두리 퍼내도 내 들어준다 한들 풀리기나 하겠는가만 산천이 하루같이 변하는데 왜 자네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타는지 나는 모르겠네 이보게 나좀 봄세 풀어도풀어도 끝이 없다면 실타레를 버리게나 쥐고 있어봐야 뭬 쓰겠는가 허허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원 꿀이나 사올 것을 헛걸음 했나 보구먼 일어서니 귓전이 필요하면 부르게나 세상의 귀는 밤낮으로 열려있다네. 보내는 내가 이보게나 내 품은 것은 무명초라 시와 때도 없이 밖으로 나가면 지천에 ..

초침

초침 숫자 3 위에 검지를 대고 초침을 막았다 바늘서 주둥이 떼어 낸 붕어마냥 파닥거리는 초침 시간을 붙들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바늘 세 개를 모두 걷어 거꾸로 돌릴까하다 포기했다 지난 시간은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초침만 막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의미 없었는데 넘어가는 달력을 막아보려 했나 그렇지 앉아서 당하는 게 억울했을 테지 과거를 하나씩 버릴 때마다 미래가 두렵다. 詩時 : 20060503 07:15 風磬 윤영환

젖 - 전순영

젖 - 전순영 질경이가 목이 말라 고개 숙인 7월 한낮, 나도 목이 말라 고개 숙인다 내 목에다 물을 부어주니 축 늘어진 팔다리가 금방 펄펄 살아난다 벼 보리 콩 팥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먹는 것은 어머니가 낳지 않은 것이 없다 하늘 아래 목숨이란 목숨은 그에게 입을 대고 산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배를 가르고 몸을 토막을 내고 두들겨 패고 불로 지지고 극약을 쏟아 붓고, 날마다 수천억 개의 비닐봉지를 한 번 쓰고 그에게 던지면 그는 숨이 막힌다 얼굴을 가린 음식물은 고름이 되어 그의 입으로 들어간다. 그는 묵묵히 삼키고 폭 삭혀서 새하얀 물을 저장해 두었다 자식들의 목구멍으로 쏟아부어준다 그는 지렁이 어머니 사자의 어머니 학의 어머니, 아름드리나무에서 개미 한 마리까지 우리는 매일 그의 젖을 빠는 아..

전화 - 마종기

전화 - 마종기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꽃 - 김춘수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