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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시인/김수영95

거리 2 - 김수영 거리 2 - 김수영 돈을 버는 거리의 부인이여 잠시 눈살을 펴고 눈에서는 독기를 빼고 자유로운 자세를 취하여보아라 여기는 서울안에서도 가장 번잡한 거리의 한 모퉁이 나는 오늘 세상에 처음 나온 사람모양으로 쾌활하다 피곤을 잊어버리게 하는 밝은 태양 밑에는 모든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 없는 듯하다 나폴레옹만한 호기는 없어도 나는 거리의 운명을 보고 달큼한 마음에 싸여서 어디고 가야 할지 모르는 마음 - 무한히 망설이는 이 마음은 어둠과 절망의 어제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너무나 기쁜 이 마음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는 없지만 확실히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텐데 - 극장이여 나도 지나간 날에는 배우를 꿈꾸고 살던 때가 있었단다 무수한 웃음과 벅찬 감격이여 소생하여라 거리에 굴러다니는 보잘것없는 설움이.. 2024. 10. 4.
國立圖書館(국립도서관) - 김수영 國立圖書館(국립도서관) - 김수영 모두들 공부하는 속에 와보면 나도 옛날에 공부하던 생각이 난다그리고 그당시의 시대가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고누구나 어른들은 말하고 있으나나는 그 우열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그러나「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라」고구태여 달관하고 있는 지금의 내 마음에샘솟아나오려는 이 설움은 무엇인가모독당한 과거일까약탈된 소유권일까그대들 어린 학도들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연령의 넘지못할 차이일까......전쟁의 모든 파괴 속에서불사조같이 살아난 너의 몸뚱아리-우주의 파편같이혹은 혜성같이 반짝이는무수한 잔재속에 담겨있는 또 이 무수한 몸뚱아리-들은지금 무엇을 예의 연마하고 있는가흥분할 줄 모르는 나의 생리와방향을 가리지 않고 서있는 서가 사이에서도적질이나 하듯이 희끗희끗 내어다보는 저 흰 벽들은.. 2024. 10. 4.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 김수영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 김수영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너와 나 사이에 세상이 있었는지세상과 나 사이에 네가 있었는지너무 밝아서 나는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결코 너를 격하고 있는 세상에게 웃는 것은 아니리너를 보고너의 곁에 애처로울만치 바싹 다가서서내가 웃는 것은 세상을 향하여서가 아니라너를 보고 짓는 짓궂은 웃음인줄 알어라음탕할만치 잘 보이는 유리창그러나 나는 너를 통하여 아무것도보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두려운 세상과같이 배를 대고 있는너의 대담성그래서 나는 구태여 너에게로 더 한걸음 바싹 다가서서그리움도 잊어버리고 웃는 것이다부끄러움도 모르고밝은 빛만으로 너는 살아왔고또 너는 살 것인데투명의 대명사같은 너의 몸을지금 나는 은폐물같이 생각하고기대고 앉아서.. 2024. 10. 3.
거리 1 - 김수영 거리 1 - 김수영오래간만에 거리에 나와보니나의 눈을 흡수하는 모든 물건그 중에도빈 사무실에 놓인 무심한집물 이것저것누가 찾아오지나 않을까 망설이면서앉아있는 마음여기는 도회의 중심지고개를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태연하다- 일은 나를 부르는 듯이내가 일 우에 앉아있는 듯이그러나 필경 내가 일을 끌고 가는 것이다일을 끌고 가는 것은 나다헌 옷과 낡은 구두가 그리 모양수통하지 않다 느끼면서나는 옛날에 죽은 친구를잠시 생각한다벽 우에 걸어놓은 지도가한없이 푸르다이 푸른 바다와 산과 들 우에화려한 태양이 날개를 펴고 걸어가는 것이다구름도 필요없고항구가 없어도 아쉽지 않은내가 바로 바라다보는저 허연 석회천장 -저것도꿈이 아닌 꿈을 가리키는내일의 지도다스으라여너는 이 세상을 점으로 가리켰지만나는나의 눈을 찌르는 이 따.. 2024. 10. 3.
水煖爐 (수난로) - 김수영 水煖爐 (수난로) - 김수영견고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팔을 고이고 앉아서 창을 내다보는수난로는 문명의 폐물삼월도 되기 전에그의 내부에서는 더운 물이 없어지고어둠이 들어앉는다나는 이 어둠을 신이라고 생각한다이 어두운 신은 밤에도 외출을 못하고 자기의 영토을 지킨다- 유일한 희망은 겨울을 기다리는 것이다그이 가치는왼손으로 글을 쓰는 소녀만이 알고 있다그것은 그의 둥근 호흡기가 언제나 왼쪽에 달려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어디를 가보나그의 머리 위에 반드시 창이 달려있는 것은죄악이 아니겠느냐공원이나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이여름이면 그의 곁에 와서곧잘 팔을 고이고 앉아있으니까그는 인간의 비극을 안다그래서 그는 낮에도 밤에도어둠을 지니고 있으면서어둠과는 타협하는 법이 없다 2024. 10. 3.
休息 (휴식) - 김수영 休息 (휴식) - 김수영남의 집 마당에 와서 마음을 쉬다매일같이 마시는 술이며 모욕이며보기싫은 나의 얼굴이며다 잊어버리고돈 없는 나는 남의집 마당에 와서비로소 마음을 쉬다잣나무 전나무 집뽕나무 상나무연못 흰 바위이러한 것들이 나를 속이는가어두운 그늘 밑에 드나드는 쥐새끼들마음을 쉰다는 것이 남에게도 나에게도속임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쉰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서)쉬어야 하는 설움이여멀리서 산이 보이고개울 대신 실가락처럼 먼지나는군용로가 보이는고요한 마당 우에서나는 나를 속이고 역사까지 속이고구태여 낯익은 하늘을 보지 않고구렁이같이 태연하게 앉아서마음을 쉬다마당은 주인의 마음이 숨어있지 않은 것처럼 안온한데나 역시 이 마당에 무슨 원한이 있겠느냐비록 내가 자란 터전같이 호화로운꿈을 꾸는 마당이라고 해서 2024. 10. 2.
헬리콥터 - 김수영 헬리콥터 - 김수영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헬리콥터가 풍선보다도 가벼웁게 상승하는 것을 보고놀랄 수 있는 사람은 설움을 아는 사람이지만또한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도 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남의 말을 하여왔으며그것도 간신히 떠듬는 목소리로밖에는 못해왔기 때문이다설움이 설움을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이러한 젊은시절보다도 더 젊은 것이헬리콥터의 영원한 생리이다1950년7월 이후에 헬리콥터는이나라의 비좁은 산맥위에 자태를 보이었고것이 처음 탄생한 것은 물론 그 이전이지만그래도 제트기나 카아고보다는 늦게 나왔다그렇지만 린드버어그가 헬리콥터를 타고서대서.. 2024. 10. 2.
書冊(서책) - 김수영 書冊(서책) - 김수영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은 것이 책에는신밖에는 아무도 손을 대어서는 아니된다잠자는 책이여누구를 향하여 앉아서도 아니된다누구를 향하여 열려서도 아니된다지구에 묻은 풀잎같이나에게 묻은 서책의 숙련-순결과 오점이 모두 그의 상징이 되려 할 때신이여당신의 책을 당신이 여시오잠자는 책은 이미 잊어버린 책이 다음에 이 책을 여는 것은내가 아닙니다 2024. 10. 2.
映寫板(영사판) - 김수영 映寫板(영사판) - 김수영고통의 영사판 뒤에 서서어룽대며 변하여가는 찬란한 현실을 잡으려고나는 어떠한 몸짓을 하여야 되는가하기는 현실이 고귀한 것이 아니라영사판을 받치고 있는 주야를 가리지 않는 어둠이표면에 비치는 현실보다 한치쯤은 더소중하고 신성하기도 한 것인지 모르지만나의 두 어깨는 꺼부러지고영사판 우에 비치는 길잃은 비둘기와같이 가련하게 된다고통되는 점은피가 통하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비둘기의 울음소리구 구 구구구 구구시원치않은 이 울음소리만이어째서 나의 뼈를 뚫으고 총알같이 날쌔게 달아나는가이때이다-나의 온 정신에 화룡점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영사판 우의 모오든 검은 현실이 저마다 색깔을 입고이미 멀리 달아나버린 비둘기의 두 눈동자에까지붉은 광채가 떠오르는 것을 보다영사판 양편에 하나씩 서있는설움이 .. 2024. 10. 1.
矜持(긍지)의 날 - 김수영 矜持(긍지)의 날 - 김수영너무나 잘 아는순환의 원리를 위하여나는 피로하였고또 나는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있는 나의 긍지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보다내가 살기 위하여몇개의 번개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꿈은 교훈청춘 물 구름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나의 원천과 더불어나의 최종점은 긍지파도처럼 요동하여소리가 없고비처럼 퍼부어젖지 않는 것그리하여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오늘은 필경 여러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보다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보다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긍지의 날인가보다이것이 나의 날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 2024. 10. 1.
나비의 무덤 - 김수영 나비의 무덤 - 김수영나비의 몸이야 제철이 가면 죽지만은그의 몸에 붙은 고운 지분은겨울의 어느 차디찬 둥잔 밑에서 죽어 없어지리라그러나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이러하지는 않다나는 노염으로 사무친 정의 소재를 밝히지 아니하고운명에 거역할 수 있는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여기에 밀려내려간다등잔은 바다를 보고살아있는 듯이 나비가 죽어누운무덤 앞에서나는 나의 할 일을 생각한다나비의 지분이그리고 나의 나이가무서운 인생의 공백을 가르쳐주려 할 때나비의 지분에나의 나이가 덮이려 할 때나비야나는 긴 숲속을 헤치고너의 무덤을 다시 찾아오마물소리 새소리 낯선 바람소리 다시 듣고모자의 정보다 부부의 의리보다더욱 뜨거운 너의 입김에나의 고독한 정신을 녹이면서 우마오늘이 있듯이 그날이 있는두겹 절벽 가운데에서오늘은 오늘을 담당하지 .. 2024. 10. 1.
구슬픈 肉體(육체) - 김수영 구슬픈 肉體(육체) - 김수영 불을 끄고 누웠다가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다시 일어났다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없어지는 자체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나는 잠시 아름다운 통각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으려 한다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의 진동이었는지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오히려 그러한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생활이여 생활이여잊어버린 생활이여너무나 멀.. 2024.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