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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 전순영

젖 - 전순영 질경이가 목이 말라 고개 숙인 7월 한낮, 나도 목이 말라 고개 숙인다 내 목에다 물을 부어주니 축 늘어진 팔다리가 금방 펄펄 살아난다 벼 보리 콩 팥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먹는 것은 어머니가 낳지 않은 것이 없다 하늘 아래 목숨이란 목숨은 그에게 입을 대고 산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배를 가르고 몸을 토막을 내고 두들겨 패고 불로 지지고 극약을 쏟아 붓고, 날마다 수천억 개의 비닐봉지를 한 번 쓰고 그에게 던지면 그는 숨이 막힌다 얼굴을 가린 음식물은 고름이 되어 그의 입으로 들어간다. 그는 묵묵히 삼키고 폭 삭혀서 새하얀 물을 저장해 두었다 자식들의 목구멍으로 쏟아부어준다 그는 지렁이 어머니 사자의 어머니 학의 어머니, 아름드리나무에서 개미 한 마리까지 우리는 매일 그의 젖을 빠는 아..

전화 - 마종기

전화 - 마종기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꽃 - 김춘수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가을의 시 - 장석주

가을의 시 - 장석주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시고, 슬퍼하는 자들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시고, 부자들에게선 귀한 걸 빼앗아 재물이 하찮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학자들에게는 치매나 뇌경색을 내려서 평생을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시고, 운동선수들의 뼈는 분리해서 혹사당한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스님과 사제들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하소서. 전쟁을 하거나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하소서. 폐허만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하니 더 많은 분쟁과 유혈혁명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 참담한 지구에서 뻔뻔스럽게 시를 써온 자들은 상상력을 탕진하게 해서 더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시집을 내느라 더는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사람들이 시들고 마르..

신발論(론) - 마경덕

신발論(론) - 마경덕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씨앗의 몸에는 날개가 있다 - 조은

씨앗의 몸에는 날개가 있다 - 조은 지난 겨울 빈 화분에 강낭콩 한 알을 넣어 두었는데요 제 딴엔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는지 땅 속 어둠을 쪼개고 고 작은 손으로 탯줄 같은 길을 내지 않겠어요 달팽이 한 마리가 흙에 뒤섞여 꼼지락꼼지락 길을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도(修道) 하는 수행자처럼 젖은 몸을 햇빛에 헹구고 있었는데요 기도가 깊으면 하늘에 닿는 것인지 아, 글쎄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는게 아니겠어요 저 보세요. 파아란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감동(感動)에 관하여

감동(感動)에 관하여 남을 위해 뭘 도왔을까? 자기합리화 중이던 모습도 떠오르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것도 도움이라 생각하며 살기도 했다. 그렇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남을 돕는 일엔 특별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은 평범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도움은 조금의 감동이 포함되어야 참 맛이 아닌가 한다. 도움의 내용 속에 물리적으로 직접 돕는 것보단 간접적일 때 감동(感動)이 더하다고 느낀다. 한편의 글이나 시가, 읽는 이에게 감(感)을 주고 마음을 동(動)하게 해서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를 종종 본다. 좋은 글은 혜안을 넓혀주거나, 나보다 남을 생각하게 만드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해주는 감동스런 도구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으며 어떤 ..

오해와 소통

오해와 소통 내가 말하는 성격이 곧다는 말은 군대식 말투나 사무적 말투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며 만들고 키운 지조를 말한다. 때문에 여러 지조들 속에 살다보면 가끔 오해를 살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쌓을 정도는 아니고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혼자 생각으로 일으키는 오해라 쉽게 풀린다. 말에 살을 좀 붙여서 부드럽게 하려고 애는 쓰는데 쉽지 않다. 글이라면 억지로라도 좀 꾸며보겠는데 말은 참 힘들다. 어릴 적 별명이 많았는데 그중 코미디언도 있었다. 말을 잘하고 남을 잘 웃기곤 했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고 대중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공부하고 독서를 즐기며 나이 들수록 말은 줄어들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경우가 줄어들게 됐다. 잘난 지조 때문에 회사 같..

마음정비소는 무료

마음정비소는 무료 배에는 조타실이 있다. 배의 방향을 정해 바른 항로로 배를 몰고 가는 자동차 운전석과 같다. 그러나 기관실에 있는 엔진이 돌지 않으면 배는 움직이지 않는다. 암초나 항로를 보기 위해 지도도 있지만 레이더가 없다면 지금 항해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밤에도 위험하다. 선상에서의 일들은 갑판장의 지휘로 이루어진다. 화물을 내리고 싣기, 그물을 던지고 걷기, 사고를 대비한 정비, 입항하고 출항할 때 부두에 배가 잘 닫도록 관리도 한다. 오랜 항해를 대비해 조리실엔 조리장이 늘 음식을 준비하고 냉장고에 들어갈 식재료도 출항하기 전에 잘 챙겨야한다. 모든 사람이 각자가 근무하는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때 항해는 순조롭다. 유기적이며 한 사람이라도 의무를 소홀히 하면 항해는커녕 배..

글 시(時)와 시간

글 시(時)와 시간 1998년부터 빈 책에 글을 쓸 때 나는 끝에 시간을 적어 왔다. 1988년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 흔적이 있고 1992년 군 시절에도 있지만 본격적인 마감을 위한 글 시(時) 기입은 어림잡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작품을 썼기에 시간을 쓴 것이 아니라 나름 일기나 탈고의 기록이라는 의미로 남긴 것이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각 가정에 모두 보급되다 보니 웹페이지 상에 글을 올릴 때 역시 글이 만들어진 시간을 입력하는 명확한 시간을 표기한다. 누리터상에서 활발하게 문학 동호회 활동을 할 때나 기타 온라인상에서도 나는 내 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늘 표기해왔다. ‘2008.02.19 04:17 風磬 윤영환‘ ’2008.02.19 04:17 風磬‘ '2008.02.19 04:17 윤영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