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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김

즐김 내일이 걱정되는 오늘이 있다. 우려하던 일은 내일 벌어지지만 그래도 내일 하루가 우울할지 아니면 무사히 넘어갈지 걱정이 되는 오늘이 있다. 그렇게 걱정되는 내일의 일을 오늘 해결해 두면 좋겠지만 인간이 하는 그 생각 그대로 오는 내일도 없고 내일을 오늘 살 수도 없다. 1초 후 당신의 집이 무너질 수도 있다. 갑자기 집이 무너지는 일은 지구에서 수도 없이 일어난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오늘을 잘 살면 된다. 무너졌어도 오늘을 잘 살아야한다. 내일을 걱정하는 건 오늘을 버리는 일이다. 왜 오지도 않는 내일 때문에 하루를 십년으로 살면서 폭삭 늙으려하는가.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내일 때문에 오늘을 버리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본다. 지금을 잘 살자. 오늘 근심으로 내일 잘사는 사람 없다. 내일은 내..

마음만 급해

마음만 급해 분리수거 그물에 꽃꽂이 하듯 잘 꽂아진 막걸리 빈병이 한 이십여 개가 부엌문 앞 작은 골목에 있는데 며칠째 어떤 우라질 놈이 저걸 차고 가는 거요. 골목이래야 막다른 골목이고 대여섯 걸음이면 끝나는 골목인데 어떤 놈이 저걸 걷어차는지 궁금해 죽것더란 말요. 소리가 안 나는 걸 보면 은밀한 짓거리 같기도 하고 이웃들은 다들 좋은 분들이니 아닐 것이고 이틀째 골목에 널브러진 빈병 주워 담자니 울화통이 치미는 거요. 잠복을 해, 말어. 하다가 부스럭 소리를 듣고 잽싸고 조용하게 부엌문을 빵끗 열고 범인을 봤는디 고양이더란 말요. 뭐 어쩌것수. 근데 고양이가 막걸리를 좋아하나? 그건 그렇고... 회사를 예로 새로운 사업계획이나 업무가 기획되면 분위기가 싱숭생숭합니다. 갑자기 서류들이 밀려들고, 없던..

도서관

도서관 혹시, 도서관 가봤수? 사는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이 어디에 붙어 있는가는 알고는 있수? 그 때가 언젠가... 중학교 때는 마포도서관을 다녔는데 입장료가 100 원이었습니다. 그 땐 도서관 앞에도 공부할 수 있는 8인용이던가? 제법 큰 책상이 일렬로 여럿 있었습니다. 위로는 눈비를 막기 위한 천막이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제법 큰 노점상이나 무슨 행사장처럼 보였지요. 그런데 그것이 왜 있느냐. 도서관 좌석이 꽉 들어차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몫이었죠. 일찍 가지 못하면 자리도 없었습니다. 그 뒤로 입대 후에 출퇴근을 하면서 경남 진해에 있는 진해도서관을 다니기도 했지만 해군이라 배를 타는 입장이었죠. 출항이 잦아 다니는 둥 마는 둥했지요. 전역 후엔 회사네 뭐네 지내며 잊고 살다가 요즘에서야 동네..

그림자

그림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평생 나를 따라 다니며 내가 저지른 짓들과 뱉어낸 말들을 저 놈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살며시 방 문턱에 서서 문을 확 닫아 끊어도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나를 따라오고 손을 뻗어 담배를 집어 들거나 술잔을 들어도 따라다니며 나를 감시한다 그래도 저 놈이 마음에 드는 것은 처음 만날 때와 지금의 색이 같고 인연들이 이별을 고해도 늘 나와 같이 있었으며 입이 무겁다는 것이다. 詩時 : 2005.01.17 11:20 風磬 윤영환

그리움

그리움 같은 하늘 아래 너와 내가 살아 있다면 이별이 아닐지도 몰라 서점에서 같은 책을 동시에 집어 든다면 같은 번호의 버스를 같은 정류장에서 기다린다면 같은 열차 앞 칸에 네가 앉아있다면 친구 결혼식 객석에서 널 본다면 모퉁이를 돌다 너와 부딪힌다면 아니면 훗날 너와 내가 같은 장소에 뿌려 진다면 새 한 마리 날아와 너와 나를 삼켜 한 몸속에서 너를 만난다면 그렇게 삶이 끝나 하늘 위에 너와 내가 산다면 이별이 아닐지도 몰라 詩時 : 2008.11.02 06:19 윤영환

이동식 레이더

이동식 레이더 땅거미 숨는 잿빛 보도 위의 또각거림 오른 뺨으로 여나무개의 골목입구가 지나갔다 다음 모퉁이 아니, 그 다음 모퉁이 버스가 서자마자 번호도 읽지 않고 올라탄다 정차 횟수나 목적지는 의미없고 앉아 흔들거리다 너의 느낌이 오면 주저없이 내려 걷는다 밤의 시작을 알리는 가로등의 신호를 엉거주춤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오른 뺨으로 여나무개의 골목입구가 지나갔다 곁눈질로 매 순간을 찍어대며 가까운 버스정류장을 향해 다시 쫓기듯 걷는다 우연히 마주치면 어떤 말을 할까 나는 널 찾아 다니며 산다 할까? 詩時 : 2005.11.08 18:33 風磬 윤영환

갔나봐

갔나봐 시계는 폐업했고 달력은 그날의 숫자만 보여준다 그마저 앗아 갈까 벽에 걸려 원을 그리고 있는 넥타이의 유혹을 가위로 끊으며 풀썩 주저앉는다 예나 지금이나 심장이 뿜어대는 대로 타들어 가는 붉은 연기를 넌 볼 수 없다 네가 원하는 하늘은 늘 푸른색이었고 아마도, 내가 늘 뱉어내는 담배연기랑 섞여 못 봤을 테니까 그래 그랬을 테야 흩날리던 체취 머문 자리 흔적들 쓸어 담아 가져간 후 이슬 되어 오를까 두렵다가도 네가 보는 푸른 하늘 구름 되겠지 우산 놓친 날 비되어 네게 스며들겠지 토닥이며 얼룩진 베게위로 잠든다 오늘더러 내일이어라 하며 그렇게 잠이 든다. 詩時 : 2006.01.25 05:04 風磬 윤영환

왜 쓰는 가

왜 쓰는 가 찾아 온 이가 무엇으로 그리 고단한 분홍빛인가 선인의 말들이 자네에게는 개 짖는 소리 아니었던가 가진 것이 있어야 풀칠이라도 할 것 아닌가? 품은 것이 없어 펼칠 것도 없으니 이젠 어데다 하소연을 할 텐가 입이나 열어 면치레나 둘러보게 자네가 온갖 넋두리 퍼내도 내 들어준다 한들 풀리기나 하겠는가만 산천이 하루같이 변하는데 왜 자네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타는지 나는 모르겠네 이보게 나좀 봄세 풀어도풀어도 끝이 없다면 실타레를 버리게나 쥐고 있어봐야 뭬 쓰겠는가 허허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원 꿀이나 사올 것을 헛걸음 했나 보구먼 일어서니 귓전이 필요하면 부르게나 세상의 귀는 밤낮으로 열려있다네. 보내는 내가 이보게나 내 품은 것은 무명초라 시와 때도 없이 밖으로 나가면 지천에 ..

초침

초침 숫자 3 위에 검지를 대고 초침을 막았다 바늘서 주둥이 떼어 낸 붕어마냥 파닥거리는 초침 시간을 붙들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바늘 세 개를 모두 걷어 거꾸로 돌릴까하다 포기했다 지난 시간은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초침만 막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의미 없었는데 넘어가는 달력을 막아보려 했나 그렇지 앉아서 당하는 게 억울했을 테지 과거를 하나씩 버릴 때마다 미래가 두렵다. 詩時 : 20060503 07:15 風磬 윤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