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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香爐(향로) - 김수영

by 풍문(風文) 2024. 9. 24.

더러운 香爐(향로) - 김수영

 길이 끝이 나기 전에는
나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으리
적진을 돌격하는 전사와같이
나무에서 떨어진 새와같이
적에게나 벗에게나 땅에게나
그리고 모든것에서부터
나를 감추리

검은 철을 깎아 만든
고궁의 흰 지댓돌 우의
더러운 향로 앞으로 걸어가서
잃어버린 애아를 찾은 듯이
너의 거룩한 머리를 만지면서
우는 날이 오더라도

철망을 지나가는 비행기의
그림자보다는 훨씬 급하게
스쳐가는 나의 고독을
누가 무슨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잡을 수 있겠느냐

향로인가보다
나는 너와같이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는 향로인가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원인을
네가 지니고 있는 긴 역사였다고 생각한 것은 과오였다
길을 걸으면서 생각하여보는
향로가 이러하고
내가 그 향로와 같이 있을 때
살아있는 향로
소생하는 나
덧없는 나

이 길로 마냥 가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티끌도 아까운
더러운 것일수록 더한층 아까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더러운 것 중에도 가장 더러운
썩은 것을 찾으면서
비로소 마음 취하여보는
이 더러운 길

<1954>